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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위한 최고의 미덕은 봉사

삼성물산(1951.1)

삼성상회의 설립과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순조롭게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지만 사업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호암의 뜻을 이루기엔 한계가 명백하였다. 당시 한국 경제는 자본과 기술이 거의 없는 상태였고, 전력 공급도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또한 단기간 내에 물자생산이 확대될 전망은 전혀 없었다. 이런 시국에 호암은 무역이야말로 국가의 급선무라는 판단으로 서울을 본거지로 하여 본격적인 국제무역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호암은 각계 각층에서 유능한 인재를 모으는 한편 큰 위험부담 때문에 반대를 하는 간부들을 모아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서울로 상경한지 1년 반이 지난 1948년 11월, 호암은 ‘삼성물산공사’의 간판을 걸었다. 삼성물산공사는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 오징어, 한천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무역회사 중 최선두에 서게 되며 승승장구 하였으나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모든 것을 정리하여 대구로 피난간 호암은 조선양조장을 찾아간다. 비상 전시상황에서 경영에 많은 고생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양조 직원들은 3억 원이나 되는 돈을 축적해 두었고 이 자금을 바탕으로 호암은 부산에서 삼성의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호암의 사람 보는 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1951년 1월 11일 ‘삼성물산’를 새로 설립할 수 있었다.

  • 오징어 3만근과 최초의 D/P

    1949년 11월 삼성물산공사의 조홍제 부사장은 마른 오징어 3만 근을 배에 싣고 홍콩으로 떠났다. 홍콩에 도착한 조부사장은 교포무역상에게 오징어의 위탁판매를 부탁하는 한편 면사 50곤을 외상매입하고 거래선인 챤넬양행으로부터도 오징어 3만 근을 담보로 면사 50곤을 외상으로 들여왔다. 이것은 우리나라 무역사상 최초의 D/P 거래였다. 도입한 면사는 수입가의 두 배 이상의 가격으로 호황을 누리며 팔려나갔고, 이에 힘입어 삼성물산공사는 설립 1년 만에 중견 무역업체로 성장했다. 오징어 3만근 D/P 거래는 삼성물산공사가 당시의 피동적인 무역형태를 탈피해 '자주무역'으로 방향전환을 시도했던 출발점이었다.

    * D/P - Document against Payment, 연불 선적서류를 첨부한 어음의 송부를 받은 은행이 화물인수에 필요한 대금을 지급하고 인도하는 조건.

  • 불탄 정미소에서 찾아낸 돈 궤짝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은 호암선생은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그 당시 양조업은 가장 유망한 사업이었으며, 조선양조에서는 소주, 청주, 막걸리뿐만 아니라 사이다까지 생산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통에 삼성물산공사는 보세창고에 쌓아두었던 수입물품을 도난 당해 큰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양조는 대구로 몰려든 피난민으로 인해 더욱 번창했다. 그야말로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차츰 전선이 남하하면서 대구도 더 이상은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직원들은 그 동안 번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부산에서 주류도매업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궤짝 두 개에 3억 원 가량의 돈을 담고 서류뭉치로 위장해 조선양조의 자동차에 실어 보냈다. 그런데 그 차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돈 궤짝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쟁 통에 알아볼 길이 없는 직원들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운전기사가 돌아왔다. 그는 경북 영천에서 미군에게 강제 징집되었고 급한 김에 길가의 정미소에 돈 궤짝을 감춰두었던 것이다. 직원들은 운전기사와 함께 영천의 궤짝을 숨겨두었다는 정미소로 달려갔으나 정미소는 불에 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잿더미를 헤치자 다행스럽게도 궤짝은 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궤짝 안의 돈도 그대로 있었다. 전쟁통에 사업자금을 모두 잃어버린 호암선생은 이 돈을 바탕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할 수가 있었다.

제일제당(1953.8)

이후 사업은 급성장하였고 실적도 충분히 좋았으나 호암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인적 자원 외에는 자원이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 수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고, 이를 위해 기술과 가공, 생산시설을 갖춘 제조업이야말로 불가결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시기상조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제조업 투자에 최종 결단을 내리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분석과 검토 결과 호암은 제지, 제약, 제당 중 제당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생산시설인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있어 자금 문제는 관계 당국의 이해와 지지로 잘 해결되었다. 하지만 배일정책에 의해 플랜트 조립을 할 수 있는 일본인 기술자가 입국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호암은 한국의 기술진만으로 플랜트 조립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었고, 김재명 공장장도 국내 기술진 만으로 공장을 완성할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악전고투 끝에 처음 예정보다 2개월 단축하여 공장이 완성되었고 1953년 11월 5일 6,300kg의 시제품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호암은 이 날을 제일제당의 창립기념일로 정하였다. 1953년의 우리나라 설탕 수입의존도는 100%였으나 이후 1956년에는 7%까지 떨어졌다. 수입을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겠다는 호암의 목표가 제일제당 창설 3년 만에 완전히 달성된 것이다.

제일모직(1954.9)

호암은 제일제당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신생 조국에 기여할 사업으로 모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직공장을 짓는다는 소식에 경제계 반응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400년 전통의 영국 모직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는 판단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호암은 주위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국제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최신 시설을 갖추기로 결정한다. 호암은 ‘대일본모직’의 기술담당이사 하야시 고헤이에게 마스터플랜을 의뢰하고, 이 마스터플랜에 의거한 모직공장 건설허가를 정부에 신청하였다. 이에 정부는 이미 발주해 놓은 서독의 스핀바우사 기계를 인수 도입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재가하였고, 호암은 정부의 의향에 따라 스핀바우사 기계를 인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스핀바우사 쪽에서는 설치공사에 60명의 독일인 기술자와 1년의 공사기간이 소요된다고 하였으나, 호암은 경험도 있고 국내 기술만으로 조립과 설치는 가능하므로 제사, 염색, 가공, 공조 분야 4명만 파견해주기를 요청하였다. 결국 사양대로 제품이 나오지 않아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핀바우사는 호암의 제의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모두 한마음으로 분발한 결과 예정보다 반 년이나 앞당긴 6개월 만에 소모(梳毛) 공장이 완공 되었으며, 1956년 5월 2일 각 부문의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시운전에 들어갔다. 최초 생산된 제품의 품질에 다소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영국제와 견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 때까지 지속적인 개발과 합리화를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국산품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싼 가격임에도 불구 수요가 형성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품질이 개선되었고 평판도 좋아졌다. 1957년 10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일모직 공장 시찰에서 제일모직 사업은 애국적 사업이라 칭찬하며 ‘의피창생’ (衣被蒼生) 이라는 휘호를 남겨주었다.

한국비료(1964.8)

당시 우리나라는 비료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원조자금의 40%를 비료도입에 충당하고 있었다. 이에 비료의 자급자족을 위한 비료공장 건설에 호암은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4.19와 5.16을 거치는 동안 비료공장 건설 사업이 수포로 돌아가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호암에게 비료공장 건설을 권하게 되고 즉석에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호암은 정부시책의 일관성과 대외교섭 등의 권한을 삼성에 일임한다는 약속을 받고 다시 한번 비료공장 건설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기업가적 마인드와 결단력으로 하나씩 풀어갔고, 1965년 12월 10일 울산공업단지 내 한국비료공장 건설 공사의 막이 오른다. 1966년 9월 16일, 한국비료 공장 착공 1년 만에 공정의 80% 가까이가 진척되고 있었고, 공장 완공의 부푼 마음으로 호암은 도쿄에서 기계선적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세창고에 보관 중이던 사카린을 직원이 실수로 정부 허가 없이 시중에 매각하는 바람에 소동이 일어났다. 벌금으로 사건을 처리했던 검찰도 여론에 눌렸는지 일사부재리 원칙을 어겨가며 강제수사에 나섰고, 호암이 그토록 꿈꾸던 비료공장은 물론 사업가로서의 업적도 모두 허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호암은 누가 건설하여 운영하든 비료공장은 국가적 견지에서 시급한 것이므로 정부가 인수하여 완공시켜달라고 하며,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할 것을 공표한다. 호암의 숙원사업이었던 비료공장을 완성 직전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호암은 1967년 3월 완공된 한국비료의 소유주식 전부(전체의 51%)를 정부에 기부하는 절차를 밟았다. 호암은 10년에 걸쳐 3번이나 도전한 끝에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결국 본인의 손으로 완성시켰다는 자부심과 역경 속에서도 정심 정념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로 자기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한국비료 사건은 파란 많았던 호암의 생애에 있어 쓰디쓴 체험이었다.

삼성전자(1969.1),삼성중공업(1974.8)

1960년대 후반 호암은 전 세계 전자산업의 동향을 주시하고, 사업성을 검토한 결과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전망 등 우리나라 경제 단계에 꼭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이에 호암은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적극적으로 정부에 설명하는 노력끝에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였다. 이후 창립 9년만인 1978년에 흑백텔레비전 200만대 생산, 1981년 5월에는 1,000만대를 돌파, 또한 1984년 3월에는 컬러텔레비전 500만대 생산을 돌파하였다. 그리고 일본,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VTR 자체개발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반도체, 컴퓨터 등 산업용 제품에 주력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이후 삼성전자는 기술혁신, 생산성 향상을 위해 꾸준히 주력하였고 명실공히 국내 정상, 오늘날에는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해왔다.

이렇게 전자산업의 기초를 굳힌 호암은 중화학공업 분야 진출에 박차를 가한다. 우선 착수한 것이 조선업이었다. 1973년 5월 일본 IHI의 타구치 회장을 찾아 협조를 구하였다. 타구치 회장은 삼성이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흔쾌히 수락하였고 이후 경남 통영군 안정리에 50대 50의 합작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직후 중동발 오일 쇼크가 세계경제를 휩쓸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도 호암은 정부로부터 합작회사 설립 인가를 받아내지만 조선업계의 침체로 결국 착공을 2~3년 연기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호암은 사업에 착수하는 용기와 물러서는 용기가 있었고,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알았다. 이후 정부와 은행에서 오일쇼크로 어려움에 빠진 중형 조선소를 삼성에서 인수하길 희망했고 호암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1977년 4월 조선소를 인수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이다. 1979년 9월, 1호 도크가 완공되고 선진국의 조선기술을 도입하여 3년간 8척의 중형 탱커와 화물선을 건조하였고, 그 후 1호 도크의 2배 규모인 2호 도크를 건설, 호암이 생존해 있던 1986년에는 연간 45만 톤의 건조능력을 갖춘다.

삼성반도체(1978.3)

호암의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이지만 호암은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라 생각하고 어려움과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게 된다. 호암은 수많은 전문가들의 의견 및 관련자료를 손 닿는 대로 섭렵하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리고 1982년 10월, 반도체, 컴퓨터사업팀을 조직하고, 1983년 3월 15일 VLSI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1년간에 걸친 기초조사, 연구, 검토 끝에 내린 힘겨운 결단이었다.

기술은 마이크론사의 64KD램, 샤프사의 CMOS공정기술과 16KS램 기술을 도입하였고, 정부, 민간 모든 차원의 협력과 합동 아래 1983년 9월 12일 착공한 공사는 8개월 18일만인 1984년 3월말에 완공되었다. 이어 1984년 5월 17일 마침내 삼성반도체통신 기흥 VLSI공장의 준공식이 열렸고, 국내 최초, 국제적으로 세 번째 반도체 생산국의 공장이 완성된 것이다. 완성 4개월 만에 64KD램의 성공 기준인 51% 제품합격률 달성, 반 년 만에는 수율(收率)이 일본 메이커에 비견하는 75%를 훨씬 넘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컴퓨터 메이커의 엄격한 심사 기준에도 무난히 합격, 9월에는 최초로 국산반도체의 해외수출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후 1984년 10월 256KD램의 독자개발에 성공하고, 1985년 3월말에는 256KD램을 주 제품으로 하는 기흥 제2라인을 준공하였다. 호암은 일렉트로닉스 혁명에서 뒤쳐지면 영원히 후진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삼성반도체의 성공 여부에 삼성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보고 계속 전진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