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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위한 최고의 미덕은 봉사

귀국한 이병철 선생은 몇 년 동안 깊은 사색과 구상 끝에 일제 강점 시기에 민족경제의 건설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첫 사업의 후보지로 고향과 가까운 마산을 골랐다. 그 당시는 아담한 항구도시였던 마산은 경남 일대의 농산물이 모이는 집산지로 수백만 석의 쌀이 마산으로 모였다가 일본으로 실려갔다. 그런 탓에 도정료를 선지급하고도 상당 기간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으며 이에 호암은 마산에서 가장 큰 정미소를 차리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암은 집안끼리 알던 합천의 정현용과 박정원을 만나 공동사업을 제의했으며 세 사람이 각각 1만 원씩을 출자하여 1936년 봄, 협동정미소를 탄생시켰다.도정업은 특성상 정미기계를 끊임없이 가동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은 미곡을 도정하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미곡의 안정적인 확보가 매우 중요하였다. 이를 위해 호암은 시중의 미곡을 지속적으로 매입하였으나 사업 1년 뒤 결산을 해보니 자본금의 3분의 2가 손실이 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호암은 일단 시작한 이상 다소의 풍파 때문에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원인을 분석했다. 군중심리에 따라 쌀값이 오를 때 사고 내릴 때 판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 호암은 거꾸로 시세가 올라갈 때는 팔고 반대로 내려갈 때는 사 보았다. 이 판단은 적중했으며 다음 결산 때는 원금을 제하고도 이익이 나왔다.

그리고 당시 물자의 수송수단이 크게 부족하여 쌀 운송에 자꾸 문제가 생기자 호암은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게 되었다. 마침 ‘마산일출자동차회사’가 매물로 나왔고, 호암은 그 회사를 인수하여 운송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미사업과 운수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은 호암은 토지매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은행융자를 받아 시작한 토지투자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년 후 호암은 660만 제곱미터 (200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중국의 루거우차오 사건과 연이은 중일전쟁 발발로 토지 시세가 폭락하자 전적으로 은행융자에 의지하던 호암의 토지투자사업은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결국 시가보다 싸게 모든 전답을 팔고 정미소와 운수회사도 처분하고 나서야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호암은 이 첫 실패를 통해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국내외 정세의 변동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그 한계를 냉철히 판단하여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피하는 한편 제2, 3선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 처음으로 호암에게 사업의 철학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