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조선양조를 인수하며 순조롭게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지만 사업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호암의 뜻을 이루기엔 한계가 명백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자본과 기술이 거의 없는 상태였고, 전력 공급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또한 단기간 내에 물자생산이 확대될 전망은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암은 무역이야말로 국가의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서울을 본거지로 하여 본격적인 국제무역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호암은 각계 각층에서 유능한 인재를 모으는 한편 큰 위험부담 때문에 반대하는 간부들을 모아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서울로 상경한지 1년 반이 지난 1948년 11월, 호암은 ‘삼성물산공사’의 간판을 걸었다. 삼성물산공사는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 오징어, 한천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는 일부터 시작해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설립 1년 반 만에 삼성물산공사가 무역회사 중 최선두에 서게 되며 승승장구 했으나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호암은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모든 것을 정리하여 대구로 피난간 호암은 조선양조장을 찾아간다. 전시 비상상황에서 경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양조 직원들은 3억 원이나 되는 돈을 축적해 두고 있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호암은 부산에서 삼성의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호암의 사람 보는 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1951년 1월 11일 ‘삼성물산’을 새롭게 설립했다.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은 호암은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그 당시 양조업은 가장 유망한 사업 중 하나였다. 조선양조에서는 소주, 청주, 막걸리뿐만 아니라 사이다까지 생산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통에 삼성물산공사는 보세창고에 쌓아 두었던 수입물품을 도난당해 큰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양조는 대구로 몰려든 피난민으로 인해 더욱 번창했다. 그야말로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차츰 전선이 남하하면서 대구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그 동안 번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부산에서 주류도매업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궤짝 두 개에 3억 원 가량의 돈을 담고 서류뭉치로 위장해 조선양조의 자동차에 실어 보냈다. 그런데 그 차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돈 궤짝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쟁 통에 알아볼 길이 없는 직원들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운전기사가 돌아왔다. 그는 경북 영천에서 미군에게 강제 징집됐고 급한 김에 길가의 정미소에 돈 궤짝을 감춰두었다. 직원들은 운전기사와 함께 영천의 궤짝을 숨겨두었다는 정미소로 달려갔으나 정미소는 불에 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잿더미를 헤치자 다행스럽게도 궤짝은 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궤짝 안의 돈도 그대로였다. 전쟁통에 사업자금을 모두 잃어버렸던 호암은 이렇게 다시 찾은 돈을 바탕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할 수 있었다.
호암은 인적 자원 외에는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 수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과 가공, 생산시설을 갖춘 제조업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시기상조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호암은 제조업 투자에 최종 결단을 내리고 조사에 착수했다. 분석과 검토 결과 호암은 제지, 제약, 제당 중 제당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생산시설인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 설립과 관련해 자금 문제는 관계 당국의 이해와 지지로 잘 해결되었다. 하지만 배일정책에 의해 플랜트 조립을 할 수 있는 일본인 기술자가 입국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호암은 한국의 기술진만으로도 플랜트 조립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었다. 김재명 공장장은 국내 기술진 만으로 공장을 완성할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악전고투 끝에 처음 예정보다 2개월 단축해 공장이 완성되었다. 1953년 11월 5일 6,300kg의 시제품이 생산되었다. 호암은 이 날을 제일제당의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1953년의 우리나라 설탕 수입의존도는 100%였으나 이후 1956년에는 7%까지 떨어졌다. 설탕 수입을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겠다는 호암의 목표는 1958년 실현됐다. 그해 설탕 국산화율은 100%였다.
호암은 제일제당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신생 조국에 기여할 사업으로 모직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직공장을 짓는다는 소식에 경제계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400년 전통의 영국 모직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호암은 주위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국제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최신 시설을 갖추기로 결정한다. 호암은 일본 도호쿠모직에서 기술담당이사로 정년퇴임한 ‘하야시 고헤이’에게 마스터플랜을 의뢰하고, 이 마스터플랜에 따른 모직공장 건설허가를 정부에 신청했다. 이에 정부는 이미 발주해 놓은 서독의 스핀바우(Spinnbau) 기계를 인수해 도입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재가했다. 호암은 정부의 의향에 따라 스핀바우 기계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스핀바우 쪽에서는 설치공사에 60명의 독일인 기술자와 1년의 공사기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러나 호암은 경험도 있고 국내 기술만으로 조립과 설치는 가능하므로 제사, 염색, 가공, 공조 분야 4명만 파견해주기를 요청했다. 결국 사양대로 제품이 나오지 않아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핀바우는 호암의 제의에 동의했다.
이후 모든 임직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 1955년 12월 소모(梳毛, 양모의 짧은 부분을 제거하고 긴 것만 골라 가지런하게 만든 섬유) 공장을 준공했다. 1년 예정이었던 공기를 6개월이나 앞당겼다. 1956년 5월 2일엔 각 부문의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시운전에 들어갔다. 최초 생산된 제품의 품질에 다소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영국제와 견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 때까지 지속적인 개발과 합리화를 추진했다. 처음에는 국산품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품질이 개선되었고 평판도 좋아졌다. 1957년 10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일모직 공장 시찰에서 제일모직 사업은 애국적 사업이라 칭찬하며 ‘의피창생’ (衣被蒼生) 이라는 휘호를 남겨주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이후 ‘더욱 크고 국민경제에 더 한층 유익한’ 사업을 구상하던 호암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비료공장 건설을 결심했다. 1950년대 말, 우리나라는 해외원조 자금의 40%를 비료 수입에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농촌 태생인 나는 비료가 모자라서 고생하는 농부의 정상(情狀)을 어려서부터 보아 왔다. 농업의 생산성 향상에 비료공장은 절실하다. 뿐만 아니라 비료의 자급이 이루어지면 거액의 외화 절약도 실현된다. 비료 공장은 반드시 이룩되어야 한다.” (호암자전 p.227)
호암은 이왕이면 수출경쟁력까지 갖춘 세계 굴지의 비료공장을 짓고자 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1964년 8월, 한국비료공업을 설립했다. 세계 공장 건설사상 ‘최대 규모, 최신 시설, 최단 공기’라는 3대 기록을 수립하며 13개월 만에 공사를 완료한 한국비료는 비료 자급자족이라는 국민적 숙원을 실현했다. 뿐만 아니라 164만 달러의 비료 수출을 이뤄냄으로써 우리나라를 하루 아침에 비료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1960년대 후반 호암은 전 세계 전자산업의 동향을 주시하며, 사업성을 검토한 결과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전망 등 측면에서 우리나라 경제 단계에 꼭 알맞은 산업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이에 호암은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적극적으로 정부에 설명하는 노력 끝에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했다.
이후 창립 9년 만인 1978년에 흑백TV 누계생산 400만 대, 1981년 5월에는 누계생산 1,000만 대를 돌파했다. 또한 1984년 3월에는 컬러TV 누계생산 500만 대에 이어, 1986년 8월 누계생산 1000만 대를 달성했다. 그리고 1979년에는 일본, 독일,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VTR 자체개발에 성공했다. 1980년대에 삼성전자는 반도체, 컴퓨터 등 산업용 제품에 주력하는 단계로 들어선다. 삼성전자는 기술혁신, 생산성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명실공히 국내 정상, 오늘날에는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해왔다.
이렇게 전자산업의 기초를 굳힌 호암은 중화학공업 분야 진출에 박차를 가한다.
우선 착수한 것이 조선업이었다. 1973년 5월 일본 IHI(Ishikawajima-Harima Heavy Industries)의 타구치 회장을 찾아 합작교섭에 나섰고, 경남 통영군 광도면 안정리 부지를 확보하기로 했다. 1973년 말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자금확보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사업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호암은 1974년 5월 정부로부터 IHI와의 합작회사 설립인가를 받은 후, 같은 해 8월 삼성 75%, IHI 25%의 합작비율로 삼성중공업을 설립했다. 그러나 석유파동의 여파로 세계 조선업계에 신규 발주가 끊어지고 이미 발주한 계약마저 취소되고 있었다. 호암은 사업에 착수하는 용기는 물론 물러서는 용기도 있었다.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알았던 호암은 조선소 착공을 2~3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정부와 은행에서 오일쇼크로 어려움에 빠진 중형 조선소를 삼성에서 인수하길 희망했고 호암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1977년 4월 조선소를 인수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이다. 1979년 12월, 1호 도크가 완공되고 선진국의 조선기술을 도입해 연간 건조능력 15만 GT(총톤수)를 갖췄다. 그 후 1983년 2월, 1호 도크의 2배 규모인 2호 도크를 완공해 1986년에는 연간 45만 GT(총톤수)의 건조능력을 갖춘다. 이 외에도 호암은 석유화학(1974년 7월), 건설(1977년 2월), 항공(1977년 8월) 등의 분야에 차례로 진출하며 기존의 경공업 위주에서 전자·중화학·건설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호암의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황혼기였지만 호암은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라 생각하고 어려움과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게 된다.
호암은 수많은 전문가들의 의견 및 관련자료를 손 닿는 대로 섭렵하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끊임없이 애를 썼다. 그리고 1982년 10월, 반도체, 컴퓨터사업팀을 조직하고, 1983년 3월 15일 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위한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 초대규모 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한다는 결정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1년간에 걸친 기초조사, 연구, 검토 끝에 내린 힘겨운 결단이었다.
기술은 마이크론의 64Kb D램, 샤프의 CMOS공정기술과 16Kb S램 기술을 도입했다. 정부, 민간 모든 차원의 협력을 통해 1983년 9월 12일 착공한 VLSI공장은 8개월 18일만인 1984년 3월말에 완공되었다. 이어 1984년 5월 17일 마침내 삼성반도체통신 기흥 VLSI공장의 준공식이 열렸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 첨단 반도체 생산국이 됐다.
완성 4개월 만에 64Kb D램의 성공 기준인 51% 제품 합격률 달성하고, 반 년 만에는 수율(收率)이 일본 회사에 비견하는 75%를 훨씬 넘어서게 되었다. 또 미국 컴퓨터 업체의 엄격한 심사 기준에도 무난히 합격해 1984년 9월에는 최초로 국산반도체의 해외수출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해 10월엔 256Kb D램 독자개발에 성공하고, 1985년 5월에는 256Kb D램을 주 제품으로 하는 기흥 2라인을 준공했다.
호암은 일렉트로닉스 혁명에서 뒤쳐지면 영원히 후진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삼성반도체에 삼성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 호암의 혜안, 그리고 간절함이 거둔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