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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위한 최고의 미덕은 봉사

호암을 만난 사람들

  • 캐더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지 캐더린 그레이엄 명예회장 캐더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지 명예회장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만난 거인"

    호암선생은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이면서도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따스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같이 경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나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친절한 분이셨다. 나중에 한국 사람들이 호암선생을 매우 어려워한다는 걸 알고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철저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마음이 섬세한 분인데, 사업가로서의 호암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도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경영을 간단히 말하자면 돈벌이로 생각한다. 그러나 호암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이미 뛰어넘은 대단한 사업가였다.

    호암선생은 만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었다. 한국의 독특한 시대적 상황이 호암선생을 애국자로 만든 것도 있겠지만, 호암선생의 경영철학에는 분명 남다른 점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경영을 간단히 말하자면 돈벌이로 생각한다. 호암선생도 물론 그런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호암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이미 뛰어넘은 대단한 사업가였다.

    나는 사업가에도 일류와 이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류 사업가가 되자면 사적인 탐욕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호암은 일류 사업가였다.

    언젠가 호암은 사석에서 "경영이란 기본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경계마저 뛰어넘어 인류의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세계적인 신문사의 소유주로서 항상 인류에 공헌하는 바른 언론을 위해 노력해왔고, 세계의 유수한 기업체를 이끄는 경영자들을 두루 만나보았지만, 호암처럼 인류번영에의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호암선생의 정신만큼은 세계를 아우르고도 남지 않았나 싶다.

    인간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러나 권력이든 돈이든 집착을 떨쳐버린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호암선생은 사유재산은 신성한 위탁물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신념대로 평생 모았던 재산을 헌납하여 삼성문화재단을 만들었고, 귀중하게 아끼던 소장품들도 기꺼이 전국민을 위해 내놓았다.

    일류 사업가다운, 거물다운 자세이다.

    최근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삼성 사업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업장의 규모와 시설이 생각 이상이었다. 자본주의 종주국에 전혀 손색이 없는 쾌적한 사업장을 둘러보면서, 미래지향적이었던 세계적인 사업가, 호암선생의 체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호암선생의 정신만큼은 세계를 아우르고도 남지 않았나 싶다.

  • 정주영

    정주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湖巖을 생각하며"

    호암 이병철 회장이 걸출한 사업가였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치밀한 판단력과 혜안으로 삼성이라는 대그룹을 일구었으며, 오늘날 삼성이 한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놓았다.

    호암은 사업이란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분이다. 인재에 대한 호암의 열성은 우리 나라 기업사에 하나의 기업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사업이란 자본의 크기로만 승패가 결정되는 일이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사업은 사람의 일이며, 자신과 주변 모두의 철저한 노력 속에서 그 승패가 좌우되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사업에 성공하기까지 온갖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업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노력은 정당하게 인정되어 한다. 호암은 사업이란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분이다. 호암의 사업관은 인재제일주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흔히 삼성사관학교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인재에 대한 호암의 열성은 우리 나라 기업사에 하나의 기업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그러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만 열정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호암은 자기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던 분이다. 단정한 그의 옷 매무새는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밖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또한 일단 시작된 사업에 대해서 제일주의를 견지하던 모습은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한 오늘날에 다시 한 번 변화, 발전시켜야 할 만한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보다는 호암의 승부에 임하는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업가란 미래의 불확실에 대한 확신을 갖고 투자를 할 수 있는 승부사로서의 기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성공이 보장되는 일이란 없다. 자신의 역량을 가늠해 보고, 시작한 일에 대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 사업뿐만이 아닌 인생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더욱이 많은 이들이 모여 있고, 생계가 달려 있는 기업조직에서 그 수장(首長)은 누구보다 먼저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불확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전력을 투구하여야 할 것이다.

    호암의 승부에 임하는 자세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는 골프를 칠 때이다. 흔히 골프를 치면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나는 호암과 골프를 치면서 그가 승부에 임하는 자세를 보곤 했다. 호암은 사업상의 경쟁뿐만이 아니라 운동경기에서도 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재계(財界)의 친선 골프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친선 경기일지라도 골프에서 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고, 어쩌다 한 번 지기라도 하면 다음 시합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지난번의 패배를 털어 내고는 했다.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운동을 하다 보면 승리를 할 때도 있고, 패배를 할 때도 있다. 그러면 호암이 그 흔한 승패의 교차에 대해 그렇게 희비(喜悲)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단순한 승부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의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던 것에 대해 스스로 용인(容認)을 못하는 것이다. 호암은 골프에 지고 나면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 되짚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점을 찾아 고치고 이것을 바탕으로 다음 시합에 임했을 것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반드시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과감히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도 있고, 정교하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재추진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스스로를 곧추 세우지 못한다면 중간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삼성에서 굳건히 그 위치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바로 호암이 승부에 임할 때 갖고 있던 이러한 자세가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반도체사업에 삼성이 진출하였을 때 누구도 이 사업이 오늘날과 같은 성공을 거두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단기간에 반도체가 성공하기까지는 중간의 고비에서 자신의 장, 단점을 살펴 단점을 극복하여 성공을 현실화 시켜 왔던 역사가 있었다. 성공을 위한 치열한 승부근성을 갖고 자신의 단점을 되짚어 스스로 고쳐 가며 성공의 길을 현실화시켜 나가는 것! 삼성이 걸어 왔던 말만큼 쉽지 않았던 그 길의 한 가운데에는 바로 호암이 있었다.

  • 잭 웰치

    잭 웰치 잭 웰치 제네럴 일렉트릭사 회장

    "진취적 의욕에 불탓던 낮은 목소리"

    호암선생이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사를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는데, 그 주변을 오로라가 감싸고 있다고 할까,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대개 목소리가 큰 편인데, 목소리 큰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호암 선생은 끝까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호암선생의 말을 듣기 위해 집중해야만 했다. 오로라가 감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 호암선생의 나지막한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그때 나는 호암선생에게 마력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호암은 대단한 의욕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내가 호암선생을 만난 것은 이미 그가 노년에 접어든 이후였는데, 그때도 그는 젊은이보다 더한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합작 문제로 호암선생을 몇 번 만나는 동안, 나는 그와 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네 가지가, 책임감과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능력 그리고 올바른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호암선생은 그 네 가지를 고루 갖춘 경영자였다. 특히 인재제일주의에 관해서는 호암선생에게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호암선생이 언젠가 자신은 로봇이 아니라 인재를 통해 경영 합리화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동서양의 문화가 달라도 좋은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을 가족같이 생각하며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호암선생의 경영 스타일을 들자면 대단한 성실성과 기술 개발에 대한 놀라운 관심도 빠뜨릴 수 없다. 호암선생을 보고 나서 기적이라 불리우는 한국 경제의 놀라운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호암은 대단한 의욕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젊어서 진취적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내가 호암선생을 만난 것은 이미 그가 노년에 접어든 이후였는데, 그때도 그는 젊은이보다 더한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호암선생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거기에는 선진국의 기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도 합작문제로 서울에서 호암선생을 만났다. 주로 두 기업의 미래와 합작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는데, 호암선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안색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호암선생에게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는데, 호암선생 역시 자신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모습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해왔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참 아름다웠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대가의 자세가 아닌가 잠시 숙연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진짜 경영자라면 호암선생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경영의 일선에서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 이어령

    이어령 이어령 이화여대 석학교수

    "황금의 조상(彫像)"

    중앙일보 창간 당시 나는 논설위원으로 이따금 호암선생을 뵙게 되는 일이 잦았다.그것도 딱딱한 자리가 아니라 즐겨 점심 식사를 드시던 한국일보 뒤의 조그만 한식집에서였다. 그날도 식사를 마친 뒤 신문사로 돌아가려는데 호암선생께서 당신의 차에 타라고 하셨다. 마침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서 사양할 처지도 못 되었다.

    구리와 돌로 만든 그런 조각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천년 만년 가는 한국의 문화를 온 국민의 마음에 심는 일대 역사(役事)를 감행하신 것이다.

    차가 세종로 거리를 막 지나가고 있는데 물끄러미 바깥 풍경을 바라보시던 호암선생께서 "저런 .... "이라고 짤막한 말 한마디를 남기시고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당시 군사정부에서 석고로 급조한 선현들의 조상(彫像)들을 세종로 길거리에 진열해 놓고 있었는데 그것이 비에 젖어 몰골 사납게 허물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민망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저게 바로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모습이요, 남들은 천년 만년 가는 동상을 세우는데 가랑비에도 견디지 못하는 저런 석고상을 만들어 세우다니 ..." 혼자 말처럼 말씀을 하시기에 옆에서 듣던 내가 당돌하게 한 마디 했다."그러지 마시고 멋있는 동상을 하나 세우시지요, 유럽 도시에 가보면 제일 부러운 게 그 훌륭한 조상들 아닙니까." 조상(彫像)과 조상(祖上)이란 말이 우연히도 동음어여서 이중의 의미를 실어서 한 소리였다. 그러자 호암선생은 진지한 표정으로 곧 나에게 제의를 하셨다."상징적인 한국의 문화인물을 찾아봐 주시지요. 일본 사람들이 근대화에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니노미야 손도구(二宮尊德)'같은 사람의 조각을 만들어 온 국민의 거울로 삼게 한 것이 아닙니까. 왕이나 정치가나 장군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문화적 인물 말이요." 호암선생의 말씀과 제의는 아주 진지한 것이었다. 한나라의 경제 정치 그리고 가정 하나 하나의 안녕과 평화는 문화와 도의의 뿌리 위에서만 꽃필 수 있다는 것과 그러자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모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겉으로는 예라고 선뜻 대답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호암선생이 가슴에 그리고 있는 그런 문화영웅이 생각나지 않았다. 끝내 나는 호암선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시간과 함께 그것은 완전히 잊혀진 과제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호암선생은 다르셨다. 얼마 뒤 나는 호암선생께서 문화재단을 만들어 평생을 모은 재화와 문화재들을 사회를 위해 쾌히 바치시는 것을 보고 그때 빗속에서 허물어져 가는 세종로거리의 조상을 보면서 한숨을 쉬시던 것이 결코 일시적인 감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정말 호암선생은 어떤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은 한국문화의 거대한 조상들을 만들어 세우셨다. 구리와 돌로 만든 그런 조각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천년 만년 가는 한국의 문화를 온 국민의 마음에 심는 일대 역사(役事)를 감행하신 것이다. 일본사람들에게 약탈되었거나 팔려나간 국보급 문화재를 되찾아오셨다. 그렇게 해서 마치 '쥬라기공원'을 만드는 일처럼 한국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탱화들을 되살려 이 땅에서 다시 숨쉬게 하신 것이다. 남들은 골동서화를 단지 투자대상으로 혹은 재화의 보존수단으로 수집하고 있을 때 호암선생은 문화재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고 아끼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돈과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부었다. 누구나 호암미술관에 가보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들이 어느 개인의 장롱 속에 퇴장 되어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 찬란한 우리 문화의 모습을 어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호암선생의 수집품들은 그야말로 광장의 조상(彫像)처럼 만인이 바라볼 수 있고 한국인만이 아니라 세계인이 우러러보고 있는 것들이다.

    그분을 통해서 나는 한국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그분은 기업인이기 전에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지켜가는 거인 패트런(patron)이지요.

    지나간 문화재만이 아니다. 니노미야 손도구처럼 학문과 근면성을 동시에 갖춘 인물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호암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호암상'을 만들어 숨어 있는 문화영웅들을 찾아내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 흩어져 있던 한국의 석학과 그 두뇌들이 호암상을 통해서 살아있는 동상으로 우리 앞에 서있게 되었다. 일본에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발표하였을 때 어느 언론사에서 파이어니어 사장과 대담하는 자리를 마련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 사장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번 호암선생의 문화에 대한 높은 식견과 열정과 그리고 문화부흥을 실천해 가시는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파이어니어 사장은 나를 만나자 마자 "이병철 회장님으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분을 통해서 나는 한국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며칠 전에도 서울에서 이 회장을 만나 뵙고 돌아왔지요. 그분은 기업인이기 전에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지켜가는 거인 패트런(patron)이지요. 우리가 만나면 사업 이야기가 아니라 깊고 무한한 아름다운 한국 문화의 이야기들을 나눈답니다." 나는 외국인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번 호암선생을 경제인이 아니라 문화인으로서 가슴 깊이 되 새겨 보았다. 그리고 세종로 거리에서 비를 맞고 허물어져 가던 그 초라한 석고상들이 갑자기 하나 하나 황금의 조각상으로 변하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더 이상 추위에 떨지 말자. 이제는 비에 맞지 않아도 된다. 호암선생같은 기업인들만 있다면 한국문화는 결코 석고상처럼 그렇게 허물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 신용호

    신용호 신용호 교보생명보험 명예회장

    "탁월한 미의식(美意識)이 빚어낸 향기로운 삶"

    수십년 사귀다 보니 남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했던 친우 호암을 먼저 보내고 늘 옆구리 깨가 허전합니다. 그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디 수월하겠습니까? 그러니 빈 옆구리가 십 년째 허전한 그대로, 그리움은 조금도 삭아 들지 않고 오히려 세월만큼 응축되고 있습니다.

    호암의 멋은 그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보는 탁월한 미적 감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호암은 멋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추구해온 사업상의 면면을 들여다 보아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을 터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가 풍기는 은근한 향취에 이르면 누구라도 그 향취에 취하고야말것입니다. 호암이 상당한 멋쟁이였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줄 압니다. 옷에 걸치는 의관에서부터 만년필, 혁대 따위의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는 최고만을 고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최고는 요즘 사람들이 흔히 집착하는 가격이나 고급상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호암은 큰 부자가 되기 전이나 그 후에나 일본 동경의 바로몽이라는 한 양복집에서만 옷을 맞춰 입었는데, 아주 작고 허름한 양복점이어서 그리 비싸지 않았습니다. 다만 양복장이의 솜씨만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부터 양복점을 하다 동경에 정착한 착실한 중국사람이었는데, 호암은 그의 성실한 삶의 자세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호암의 멋은 그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보는 탁월한 미적 감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한 식견을 갖고 있으니 웬만한 것들에 대해 까다롭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쓸쓸한 인생유전의 한스런 가락에 눈시울 적실 줄도 아는 진정한 우리 문화의 애호가이자 향유자였으며, 벗과 더불어 그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보기 드문 명사였습니다.

    실제로 호암은 만만찮은 미의식(美意識)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민족의 가락을 들을 줄 알았고, 몹시 아꼈습니다. 일주일에도 두세번씩 두세 명의 친우들과 우리가락에 심취하곤 했습니다. 술을 즐겼던 것도 아니어서 그런 조촐한 모임은 오직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혹간 음악을 모르는 이가 끼어들어 듣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루함을 참다 못해 연주에 참견이라도 할라 치면, "어허, 그냥 좀 소리나 들어보게" 하고 점잖게 만류하던 그였습니다. 호암은 가야금병창으로 듣는 홍보가 중의 몇 대목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소리에 빠져 있다가 구성진 가락이 꺾어지는 순간이면 그만 무릎을 탁 치며, "하, 참 절묘하네 그려" 하고는 소리는 이미 저만치 흘러가고 있는 그 한 대목에 붙들려 한동안 자기만의 흥취에 잠겨 있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그는 쓸쓸한 인생유전의 한스런 가락에 눈시울 적실 줄도 아는 진정한 우리 문화의 애호가이자 향유자였으며, 벗과 더불어 그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보기 드문 명사였습니다. 나도 어지간히 우리 가락을 귀히 여기고 즐기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호암의 식견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소리가 홀대 받던 시절, 우리가락에 심취해서 기꺼이 가난을 택했던 많은 국악인들을 음으로 양으로 은근히 도와주며 그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독려한 것도 바로 호암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악인치고 호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가 드물고, 국악사의 이러저러한 일에 호암의 사랑이 미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는 이가 별로 없을 테지만, 어쩌면 우리 국악사에 미친 호암의 영향도 그가 일으킨 사업의 성과 못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러한 생활에서의 향취야말로 호암을 호암답게 하는 것이려니 믿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재벌이 공수래 공수거를 자기 삶의 지평으로 삼기까지는 도자기가 가마에서 몇 날 며칠 구워지듯 은근한 단련이 필요했을 것이고, 인생의 멋을 즐기는 그의 멋스러움이 그에 일조했음 또한 자명합니다.

    호암의 향기는 세상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했으며, 동시에 그는 타인이 지닌 향기를 분별해 내는 데에도 탁월한 식견이 있었습니다.

    호암이나 나나 인간은 모름지기 저마다의 향기를 지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저만의 향취를 담아내지 못하는 그릇이라면 대가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호암의 향기는 세상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했으며, 동시에 그는 타인이 지닌 향기를 분별해 내는 데에도 탁월한 식견이 있었습니다. 삼성이 인재의 보고라는 말을 듣는 것도 그 덕분일 것입니다. 아직도 그의 향기 세상에 은은한 걸 보니 반갑고, 그래서 더욱 먼저 떠난 친우 생각이 간절합니다.